조선과 떼어놓을 수 없는 하기 근대문화유산…유네스코에 5곳 등재(시리즈5)
조선과 떼어놓을 수 없는 하기 근대문화유산…유네스코에 5곳 등재(시리즈5)
  • 이두 기자
  • 승인 2017.07.14 2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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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희생 전혀 언급안돼… 하기시 주민들은 조선과 악연 전혀 몰라

 

하기시 유적 5곳이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곳곳에 5곳을 소개하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2015년 유네스코는 일본의 23개 유적을 메이지시대 일본산업혁명유산으로 지정했다. 메이지유신의 본고장인 하기시에는 5개가 포함됐다. 요시다쇼인이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비롯해 하기성터, 하기반사로, 조선소터, 군사무기를 만든 제철 유적이다. 논란이 적지않았지만 일본은 강행했고 유네스코는 받아들였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상당수는 조선인의 희생돼 연관되어 있다.

요시다쇼인의 사설 교육기관인 쇼카손주쿠.

◇쇼카손주쿠(松下村塾):요시다쇼인의 세운 사설 교육기관이다. 요시다쇼인은 제자들에게 정한론을 주창했다. 그는 서양의 군함과 군사력을 목격하고 일본도 하루빨리 근대화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본 근대화에 앞장선 90여명의 제자가 이곳에서 요시다쇼인의 가르침을 받았다. 조선과 떼어놓을 수 없은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강화도 조약의 주역 이노우에 가오루, 군국주의 아버지 야마가타 아리토모, 유신3걸의 하나인 다카스키 신사쿠, 기토 다카요시 등이 이 곳서 젊음을 불태우며 근대화 재목으로 성장했다.

◇하기 조카마치(萩城下町): 임진왜란후 1600년 세키하가라 전투에서 일본 서부지역 대표 영주였던 모리가는 도쿠가와 진영에 패해 하기로 쫓겨난다. 모리가는 하기로 와서 성을 짓고 계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를 만든다. 하기성하마을이다. 하기성은 1604년 모리가가 축성했다. 메이지유신이후 천황에게 모든 걸 바치는 판적봉환으로 하기성은 해체됐고 공원으로 조성됐다. 성아래 마을엔 요시다쇼인의 제자였던 다카스키 신사쿠의 생가가 있고 이토히로부미가 공부했다는 사찰도 있다. 유신3걸인 기도 다카요시와 옛저택과 구사카 겐즈이의 진격상이 있다. 메이지유신때까지 조슈번(현 야마구치현)의 중심지였으며 당시 사회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다. 일본 근대화에 상관없으나 아베 총리가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인물들이 자랐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집어넣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하기 반사로:1856년 서양식 대포를 만들기 위한 재료를 얻기 위해 제조됐다. 일본에 있는 2개 반사로 가운데 하나다. 막부말기 군사력을 키우려는 조슈번의 열의를 보여준다.

◇에비스가하나 조선소터:대형 군함을 건조하던 곳이다. 서양의 무력 개항 압력이 있자 막부는 조슈번에게 군함을 만들 것을 지시한다. 조슈번은 서양식 군함을 배워와 1856년 최초로 서양식 군함 헤이신마루를, 1860년에는 경신마루를 만들었다. 당시 규모 그대로 방파제가 남아있다.

◇오이타야마 타타라 제철 유적:하기시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군함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철을 공급했다.

유산등록 축하 플래카드.

◆조선인의 아픔은 없다
 일본의 근대화 산업화를 자랑할 뿐 세계 문화유산에는 조선인의 희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기시의 5곳도 마찬가지다. 5곳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뿐 조선과의 관계는 단 한줄도 보이지 않는다. 특히 요시다쇼인이 개인 교실이었던 송하촌숙에서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조선을 정복하려는 야욕을 키웠다. 그는 서양 열강에 침탈당한 일본의 국익을 조선과 만주에서 벌충하자고 부르짖은 정한론의 원조다. 대동아공영론을 부르짖었다. 하기시에서 조선과 관련된 문구를 발견한 것은 단 한줄이었다. 이토히로부미가 한국인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구절이었다.
 하기성주였던 모리가와는 임진왜란때 3만명의 대병력을 출동시켰다.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갈 때 조선의 도공을 셀수 없이 붙잡아갔다. 하기 도자기에는 조선 도공의 피가 면면히 흐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도공 이경, 이작광 형제가 도요지를 차린 것이 기원이 돼 오늘에 이른다. 조선의 도공들이 활약한 하기야키 도자기도 유명하다. 한국 도예가들과의 교류도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피땀 흘리며 일했던 조선인들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1894년 하기시 출신인 육군대장 오시마 요시마사가 병력 수천명을 이끌고 경복궁을 점거하고 고종을 꼼짝 못하게 했다. 청일전쟁 당시에는 아산과 평양에서 청군과 싸웠다. 오시마 요시마사는 현 아베신조 일본총리의 고조할아버지다.
 실제로 하기시민들은 그들이 위인이라고 칭하는 인물들과 조선과의 관계를 몰랐다. 하기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에게 벌인 악행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한 시민은 “한국인들이 하기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를 원흉으로 여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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