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22대 정조의 능행차행렬 재현 행사가 서울과 시흥, 안양, 수원, 화성 일대서 펼쳐졌다. 올해는 9월 23일과 24일 서울 창덕궁을 출발해 수원화성에 도착하고 화성 능까지 가는 행사가 진행됐다. 정조는 대궐 밖에서 나와서도 머물렀다. 왕이 궁궐 밖에서 묵은 곳을 행궁(行宮)이라고 한다. 능행차를 하는 곳에는 시흥행궁과 사근참행궁, 화성행궁이 있었다. 그럼 인천에는 과연 어디에 행궁이 있었을 까. 강화행궁과 월미도 행궁이 있었다. 부평에도 행궁이 있을 뻔 했다.
◆강화행궁, 전쟁 피신처로 만들어져… 본래 고려궁궐
강화행궁은 본래 고려시대 궁궐이었다. 고려 왕실은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에서 39년간을 머물렀다. 고려는 1232년(고종 19년) 6월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그 이듬해부터 궁궐과 관아를 지으면서 규모는 작아도 개경의 궁궐과 똑같은 이름을 붙이고, 궁궐의 뒷산도 개경과 마찬가지로 송악이라고 불렀다. 1270년(원종 11년) 5월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고 39년간 수도였던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과의 합의에 따라 모든 궁궐을 헐어버리거나 불 질러버림으로써 고려궁지에는 빈터만 남게 되었다. 강화에는 고려 유적과 능이이 많이 있다. 고려산에는 고종의 홍릉(弘陵)과 왕비 원덕태후의 곤릉(坤陵), 희종의 석릉(碩陵),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가릉(嘉陵)이 있는 등 몽골에 굴하지 않던 고려인들의 기개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조선 태종은 한양도성으로 통하는 강화도의 역할을 중요시하여 도호부를 설치하고, 경기 병마절도사가 강화 부사를 겸하도록 했다. 1627년 청이 3만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온 정묘호란이 일어난다.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피신해 3개월을 머물렀다.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청의 군대를 물러가게 한다. 인조는 강화행궁의 대대적 정비에 나서며 1631년 행궁을 만든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다. 그러나 청의 군대가 미리 알고 길을 막았다. 먼저 떠난 왕비 일행만이 강화도에 머물렀다.
이것으로도 불안한 1629년(인조 7년) 강화도 고려궁터에 행궁을 짓고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행궁인 연경궁(延慶宮)의 동북쪽에 임금의 침전인 강안전(康安殿), 태조와 세조의 어진을 모신 봉선전 등 많은 궁궐 건물들을 지었다. 숙종은 군사방비 시설로 한양도성의 길목인 강화도 곳곳에 진보(鎭堡)와 돈대(墩臺)를 많이 설치했다. 강화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철벽 방어와 수비를 위한 군사시설을 만든다. 마니산 서북단의 장곶보(長串堡)를 비롯하여 서쪽으로부터 검암돈대· 미루돈대· 동막돈대· 분오리돈대· 칠오지돈대 등 진보 12개, 돈대 53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5진· 7보만 남아있다.
강화행궁은 한동안 강화유수로 사용된다. 1782년 정조는 강화유수부 안에 국가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도서관으로 외규장각을 짓는다. 1866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하는 병인양요가 일어난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은괴 19상자와 채색 비단으로 표지를 꾸민 어람용 의궤 수백 권을 약탈하고, 행궁과 외규장각의 수많은 다른 문서들은 모두 불태웠다. 살아남은 것은 강화유수부와 이방청 건물뿐이었다.

◆월미도행궁, 유사시 강화로 들어가기 위한 또 다른 통로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된 인천 월미도에도 행궁이 있었다. 조선 왕이 전쟁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가기 위해 잠시 머물러 했던 곳이다. 병자호란의 교훈을 얻은 효종은 1656년 유사시 어가(御駕)의 강화도 피난길이 막혔을 경우를 대비하고자 했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의 병사들이 강화도 피난길을 차단하자 인조 일행은 강화가 아닌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강화 피난로가 차단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인천과 영종도를 경유해서 강화도 남단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우회로를 개발했다. 이 우회로는 뱃길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행렬이 물때를 기다리면서 잠시 머물거나 유숙할만한 장소가 필요했다. 결국 월미도에 행궁이 들어서게 됐다.
월미도 행궁은 8칸의 정전(正殿)이 중앙에 위치하고 동서남쪽에 회랑을 둔 ‘ㅁ’자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임금을 호위하는 병사들의 수직간(守直間)이 별채로 있었다. 그러나 행궁이 지어진 이후 병자호란과 같은 급박한 사태가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이 건물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인천 중구 월미도에 왕의 행차에 대비한 행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부사용(副司勇) 민치대가 상소하기를 인천의 영종은 해안 방어의 요로이며. 왕성과의 거리가 100리도 안 되는 곳이며, 삼남(三南)의 문호가 되어 강도(江都 : 강화도)와 더불어 서로 성원하게 되니, 강도에 중점을 돌리는 계책으로 영종을 버리고는 그 형세를 의지할 데가 없다고 상소했다. 정승 홍명하는 행궁을 인천 월미도에 설치하기를 건의했다. 월미라는 곳은 곧 인천과 영종도 사이의 소치(所峙 : 작게 솟아오른 지역)이니, 그의 의도는 대개 일의 위급하기가 병자년·정묘년과 같이 되는데도, 유시(流 : 얼음이 녹아 흐름)로 인해 끊어지고 갑곶진을 통할 수 없게 된다면, 인천으로부터 영종에 이르고, 영종으로부터 강도(江都)에 이르게 될 것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조정에서 영종을 승격하여 방어사(防禦使)로 삼는 것은 계책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방이 수십 리에 지나지 않고 백성이 수백 호에 차지 않으면서 바다 속에 외롭게 있는데, 인천은 3면이 바다에 닿아 있고......' 하니 답하기를, '소사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겠다' 하였다.’ <1707년(숙종 34년) 4월 21일>
이 기록에서 월미행궁의 설치가 현종때 우의정인 홍명하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월미도 행궁의 규모는 정전 8칸, 동월랑 4칸, 서월랑 4칸, 남월랑 7칸, 수직간 3칸, 내중간 1칸, 외중간 1칸으로 작은 규모였으며, 목조로 당시 절이었던 임해사 터에 자좌오향으로 1664년(현종 5년) 인천부사 윤부가 세웠다고 한다. 월미행궁에는 수직군 3명이 배치됐다. 부역을 면해주고 이곳의 땅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제물진에 배2척을 두어 영종진 사이에 도해(바다를 건넘) 연습을 했다. 제물진에서 월미행궁, 그리고 영종진까지 왕복하는 훈련을 한 것이다.
조선 정조 3년(1779) 3월 월미행궁을 수리하고 소멸장, 의류 등을 강화도에 옮겨 보관토록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후 청의 위협이 줄어들어 강화도로 들어갈 필요성이 없어졌기에 실제로 조선 왕들이 월미도 행궁을 이용했다는 기록은 없다.

◆부평에 행궁이 있을 뻔 했다
세종 때인 1438년 부평도호부는 '온천 파동'을 겪는다. 세종은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부평의 온천을 찾아볼 것을 명령했다.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수백 곳의 땅을 파 보았지만 온천을 찾을 수 없었다. 세종은 어려서부터 한쪽 다리가 불편했고 등에는 부종이 있어 힘들어 했다. 세종은 대신들의 권유에 따라 온양온천에 가서 목욕한 후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세종은 왕이 자주 찾아오면 불편할 것을 걱정한 부평 사람들이 일부러 온천을 숨기는 것이라 생각하고 부평을 현으로 강등시켰다. 8년이 지난 1446년이 돼서야 도호부로 복구됐다. 만일 이때 온천이 발견되고 세종이 부평도호부를 찾아 며칠을 숙박했더라면 행궁이 지어질 수도 있었다.
1797년 정조대왕은 김포 장릉에서 수원으로 가는 길에 부평도호부청사에 잠시 머물렀다. 현재 계양구 부평초등학교 안에 부평도호부가 있었다. 여러 관아 건물이 있었는데 1909년에 이곳에 학교를 세우면서 한 채만 남겨서 옮겨 놓았다. 학교 안에 부평부사 선정비들이 있고 선정비 앞에 수령 500년, 높이 25m인 은행나무가 있다. 관아에 있었던 나무다.
은행나무 뒤쪽에 ‘어사대(御射臺)’라고 적힌 돌이 보인다. 정조 21년(1797) 왕이 김포의 장릉을 참배하고 사도세자의 무덤인 수원 현륭원을 가는 길에 이곳에서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어사대 뒤편에는 연못으로 추정되는 곳이 보인다. 욕은지(浴恩池)라 부르는 곳이다. 오른쪽에 옛 연못의 돌들이 보인다. 지난 2005년 부평지역 학생과 시민 1000여명이 조선 정조대왕 어가행렬을 재연하기도 했다. 당시 코스는 작전역∼계산삼거리∼부평도호부청사(현 부평초등학교)에 이르는 2.9km 구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