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9년 9월 18일 개통… 인천서 서울까지 12시간서 1시간 40분대로 단축
1969년 복선, 1974년 전철 시대 열어… 2005년 복복선 완공돼 40분대로
지난 7월 7일부터 경인전철 동인천~용산 구간에 특급 급행 열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기존 일반 전철이 모든 역에 서는 대신 특급은 동인천을 출발해 주안-부평-소사-구로-신도림-노량진-용산까지 6개역만 선다. 일반 전철은 60분정도 걸렸으나 특급은 20분이 단축돼 40분 걸린다. 특이하게 특급열차가 서는 역이 경인선 개통당시 생겨났던 역과 거의 흡사하다. 1899년 경인선 인천~노량진 구간 개통 당시 역은 인천역~축현역(현재 동인천역)~우각역(지금은 없어졌으며 도원역 인근)~부평역~소사역~오류역~노량진역이었다.
◆“천지가 진동” 당시 사람들 놀라
당시 독립신문은 경인철도가 달리는 것을 보고 이렇게 보도했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같아서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에서 연기는 반공에 솟아 올랐다. …수레 속에 앉아 영창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도는 듯하고 나르는 새로 따르지 못하였다. 80리되는 인천을 순식간에 당도하였는 데 그곳 정거장에 배포한 범절은 형형색색 황홀 찬란하여 진실도 대한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였다.’
1880년대 조선이 개항하자 일본 영국 미국 등이 조선 철도부설권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조선 정부도 철도의 필요성을 느꼇다. 1889년 주미공사였던 이하영이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정교한 철도모형을 갖고 와 조정에 소개하며 철도 도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나자 일본은 강력하게 서울~인천, 서울~부산에 철도를 놓을 것을 조선에 주장한다. 일본은 이미 1880년대 중반 조선에 철도를 놓을 것을 가정해 조선 몰래 철도예정지를 답사하기도 했다. 영국 독일 러시아 미국 등은 일본이 한국에서 철도를 독점해선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조선은 일본의 압력에 불안해하고 을미사변으로 반일감정이 높아지자 1896년 3월 29일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오스(J.R.Morse)에게 넘긴다. 조건은 ‘12개월내 착공, 3년내 완공’이었다.
◆철도부설권 결국 일본으로
일본이 그토록 탐을 냈지만 모오스에게 부설권이 가게 된데 대해 몇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당초 조선은 경인철도를 직접 건설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모오스가 조선에 15만달러를 헌납하고 정부 관리들에게 증여한다는 밀약을 해 특허권이 주어졌다는 설이다.
둘째는 미국 정부와 로비다. 당시 미국공사 알렌은 고종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었다. 모오스가 알렌에게 부탁해 이뤄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상당히 신빙성 있다. 당시 알렌의 별장이 인천 우각리에 있었고 실제로 우각역이 생겼고 1897년 우각리에서 첫 번째 기공식이 열렸기 때문이다. 일본은 강력 항의했다.
모오스는 기대와 달리 자금압박에 시달리고 만다. 미국 회사들이 조선에 투자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모오스는 공사가 계속 지연되자 1898년 철도부설권을 결국 일본에 넘기고 만다.
1899년 4월 23일 인천역에서 제2차 기공식을 하고 본격적으로 공사를 재개한다. 그 해 9월 13일 인천역에서 개통식을 거행하고 18일 마침내 철도가 다니게 된다. 운행기관차는 미국 브룩스사에서 만든 모갈형 탱크 기관차였다. 4대의 증기기관차가 객차 6량, 화차 28량을 싣고 1일 4회 운행했다.
1900년 7월 5일 한강철교가 준공되고 7월 8일 노량진~서울(당시 서울역은 서대문으로 현재 이화여고 자리) 구간이 개통된다. 1900년 11월 12일 서대문에서 서울~인천간 전체 노선 개통식이 진행된다.
1906년 4월 우각역이 없어지고 1908년에는 청과물 시장에 있던 축현역이 지금의 동인천역 자리로 옮겨진다. 축현역은 1926년 상인천역으로 바뀌고 다시 동인천역으로 개칭된다. 이 구간 운행에 1시간 40분이 걸렸다. 12시간 걸리던 거리가 이처럼 줄어든 것이다. 몇 달간 하루 2회 왕복하다 이후 5회까지 늘어났다. 초창기 열차의 평균속도는 시속 20㎞였으며 최고속도는 60㎞였다.

◆1960년대 복선화
경인철도 복선화는 1960년대에 이뤄진다. 1960년대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로 수도권이 팽창하면서 교통의 확대 필요성이 커진다. 1965년 1월 동인천~주안, 같은 해 9월 주안~영등포 구간이 복선 개통된다. 영등포~서울은 1969년 복선화된다.
1974년 경인선 전철 시대가 열린다. 종전 인천~서울구간인 경인철도가 청량리를 거쳐 성북까지 연결됐다. 전철로 스피드화가 이뤄졌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1시간이면 도착했다. 대신 기존역 중간중간에 새로운 역이 많이 생겼다. 지금은 주요역들이 되었지만 동암 백운 송내 중동 역곡 개봉 구로 신도림 역등이 경인전철 개통을 전후해 생겨났다.
1999년 일부 구간에서 전철이 복선화됐다. 2005년까지 복선화가 진행됐다. 지금은 용산과 인천 구간의 주요 역에서만 서는 직통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얼마 전부터 특급전동열차까지 달리고 있다. 두 전철이 함께 서울로 달리는 모습도 종종 보게 된다.
우각리 철도기공식때 관리들 흰옷 입어
1897년 3월 22일 오전 우각리(牛角里, 지금의 도원역 인근)에서 기공식이 열렸다. 기공식에는 경인철도 건설에 주요 역할을 한 미국공사 알렌과 한성판윤 이채윤와 외국인 기술자, 조선인 인부들이 참석했다. 사진에 나타난 한국인 관리들의 차림이 특이하다. 공사장에서 흰옷을 입고 있다. 1895년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하는 을비사변이 일어났다. 3년간의 국장으로 조선인들은 곡을 하고 두건을 써야하는 전통 장례의식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기공식 장소인 우각리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배다리쪽에서 도원동으로 올라오는 고개 모양이 쇠뿔고개였다는 설과 지형이 쇠뿔모양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우각리는 1936년 일본식 지명인 창영정으로 바뀌었다고 광복후 창영동으로 변경된다.
◆일제강점기때 열차 통학은 사랑과 우정의 공간
일제강점기때 인천 지역의 뛰어난 학생들이 경인 열차를 이용해 서울로 통학했다. 당시 명문학교였던 서울 경성중학교나 배재학교, 진명여고 등으로 통학을 했던 학생들이 상당수 있었다. 학생들은 교복을 입었기에 한눈에 띄었고 학생들이 자주 마주치다보니 서로 친해지기도 했다. 1920년대 서울로 통학을 했던 인천의 한 유명인사는 “겨울에는 여학생들이 검은 두루마기에 자주색 털실 목도리를 두르고 책보를 들고 있었는 데 그 모습이 참으로 멋져보였다”고 책에다 기록했다. 통학생끼리의 모임도 있었다고 한다. 문화와 예술, 스포츠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이어서 인천의 문화와 체육을 이끄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배재학교 통학생 모임인 인배회는 전인천축구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하기도 했다.
◆인천에도 지하철 1,2호선 들어서… 동서남북 가로질러
1999년 10월 인천지하철 시대가 열린다. 개통 당시 구간은 동막~박촌역이었다. 이어 송도국제도시가 개발되고 계양역도 신설돼 국제업무지구~계양 구간이 완성된다. 연수지역의 원인재역은 2015년 재개통된 수인선 구간과도 연결된다. 지난해는 인천지하철 2호선이 준공됐다. 서구 검단에서 주안과 인천시청을 지나 인천대공원을 통과한다. 처음에는 사소한 고장이 있었으나 인천시민의 발로 확실히 자리잡았으며 증편이 필요할 정도로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개통 1년만에 하루 15만여명이 이용한다. 지하철 2호선은 환숭역이 3곳 있다. 검암역은 인천공항철도, 주안역은 경인전철, 인천시청역은 인천지하철 1호선과 연결된다.
지하철 7호선인 온수~부평구청 구간도 서울과 이어져 부평지역 주민들에게 편리를 제공한다.한편 국토부는 내년부터 철도의 날 기념식을 6월 28일 개최할 예정이다. 1899년 9월 18일 경인선 개통을 기념하는 현행 철도의 날은 일제가 1937년 기념일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