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기형도(1960∼1989)를 기리는 기형도문학관이 11월 10일 경기 광명시 소하동에서 문을 열었다. 기형도는 1960년 2월 16일 인천시 연평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64년 일가족이 시흥군 소하리[현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706-1번지]로 이사했다. 당시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과 수재민들의 정착지였으며, 도시 배후의 근교 농업이 성한 농촌이었다. 기형도는 돼지 치는 집 막내아들로 소하리란 공간에서 유년기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광명에서의 유년 시절은 기형도 문학의 중요한 시적 모티브가 됐다. 그의 시 속엔 광명에 대한 묘사가 많다.
1969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고 1975년 바로 위의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 누이의 죽음은 기형도의 일생에 깊은 상흔을 남기게 된다. 이 무렵부터 기형도는 시를 쓰기 시작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기형도는 1979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다. 문학 동아리인 연세문학회 가입을 계기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1982년 연세대학교 윤동주문학상에 시 ‘식목제’가 당선되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1985년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안개’가 당선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84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한 그는 정치부와 문화부, 편집부 기자로 일하는 틈틈이 작품을 발표하였다.
시집 출간을 준비하던 기형도는 1989년 3월 7일 종로3가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뇌졸중으로 알려져 있다. 만 스물아홉의 생일을 엿새 앞둔 기형도 시인은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우리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1989년 5월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간행되었다. 그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면서 1990년 3월에 기형도의 1주기를 맞아 소설과 편지, 단상 등이 수록된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이 발간되었다. 그의 급작스런 죽음 후 두 달 만에 나온 유고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이 지금까지 25년 동안 30만여부가 팔릴 만큼 꾸준한 인기를 얻는다.
그는 현재 경기도 안성시에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혀 있다. 묘비에는 세례명인 ‘그레고리오’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2006년 6월 경기도 광명시 하안1동 광명시 실내체육관 앞 야외공원에 그의 시 ‘어느 푸른 저녁’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고 있다.
몇 달전에 스물세살 기형도가 술값을 대신 내준 여성에게 건넨 시가 공개돼 화제가 됐다. 그가 안양 방위병 시절 문학회 활동하며 쓴 작품이었다. 대학을 휴학하고 방위병(단기사병)으로 군복무를 하던 기형도는 근무지 안양의 문학모임 수리문학회에서 활동했고, 술자리에서 여자 회원들이 술값을 내면 그 보답으로 시를 써주었다고 한다.

◆시민들과 함께 하는 기형도문학관
기형도 문학관 1층은 시집과 육필원고 전시실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2층은 북카페와 자료실, 3층은 강당과 창작체험실을 갖추고 있다. 광명시는 29억5000만원을 들여 시인이 살았던 소하동 일대 5만3000여㎡ 부지에 지상 3층, 연면적 879.78㎡ 규모로 문학관을 건립했다.
개관식에는 양기대 광명시장,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 시인의 어머니 장옥순 여사와 누나 기향도씨, 시인 기형도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 등이 참석했다. 광명시는 누나 향도씨를 명예관장으로 위촉했다. 개장시간은 화∼일요일(월요일 휴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모든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당초 광명시는 시인이 실제 살았던 안양천 끄트머리에 문학관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땅 주인이 거부해 집 인근이자 시인이 많이 오갔던 소하동에 문학관을 짓게 됐다고 한다. 광명문화재단 관계자는 “유가족들도 ‘외진 안양천 주변보단 번화가에 들어섰으면 좋겠다’고 찬성했다”고 말했다.
문학관 조성엔 시인의 가족과 시민의 의견이 반영됐다. “예비 문학도를 위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가족의 제안에 2층엔 ‘시집 전문 도서관’과 북 카페가 생겼다. 예비 문학도를 위한 습작실도 마련됐다. 3층엔 주민들을 위한 체험·교육공간과 강당도 들어섰다. 문학관 개관을 알리는 포스터 사진도 “시인이 밝게 웃는 모습이 좋다”고 유가족이 제안했다고 한다. 문학관은 전시하지 못한 남은 유품을 보관하기 위해 가습기와 제습기 등 전문 장비를 갖춘 수장고도 3층에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