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병사 ‘기적의 탈출’...세계가 주목한 JSA(공동경비구역)
북한병사 ‘기적의 탈출’...세계가 주목한 JSA(공동경비구역)
  • 시니어오늘 기자
  • 승인 2017.12.0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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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은 파주… 유엔사령부 관할 , 6·25휴전회담 장소로 원래 이름 '널문리가게'

 

북한병사 귀순으로 판문점이 다시 주목받았다. 사진은 북한의 8.18도끼 만행 사건. /출처-통일부 남북회담 본부

북한 지프차가 논밭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쏜살같이 달리며 남쪽으로 내려온다. 전조등을 켜고 북한의 ‘72시간 다리’를 건너고 ‘김일성 친필비’를 지나 군사분계선쪽으로 질주한다. 잠시후 우회전하더니 지프차의 바퀴가 배수로에 빠진다. 몇 차례 시동을 걸었으나 실패한다. 곧바로 북한군들이 정신없이 달려간다. 지프차에 있던 북한 병사는 차에서 내려 남쪽으로 달린다. 북한군 3명이 도망가는 병사를 겨누고 사격했으며 다른 한명은 엎드려서 사격을 시작한다. 귀순 병사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이 병사는 5~6발을 맞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에서 쓰러진다. 이 병사를 쫓던 북한군 1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왔다가 이를 알고 쏜살같이 북쪽으로 다시 넘어간다. 우리 군이 쓰러진 귀순 병사를 발견하고 포복으로 접근해 극적으로 구출한다.
지난 2017년 11월 13일 오후 3시10분쯤부터 4시까지 JSA(공동경비구역) 일대에서 벌어진 북한병사의 귀순은 첩보전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실감나는 광경이었다. JSA(공동경비구역)를 통한 북한 병사의 귀순 장면이 얼마전 동영상으로 공개됐다.
 자유를 향한 북한 병사의 귀순은 그야말로 ‘기적의 탈출’이었다. 북한 병사의 귀순으로 공동경비구역이 다시 주목받았다. 공동경비구역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판문점(板門店)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원래 명칭은 널문리 가게
판문점은 서울에서 북북서쪽으로 60km 정도 떨어져 있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소재한 지역이다. 행정구역상 지명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이다. 그러나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하고 있는 특수지역이다.
오늘날의 판문점은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사측과 공산(북한·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해 1963년 10월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구역 군사분계선상에 설치한 동서 800m, 남북 400m 장방형의 공동경비구역을 말한다.
판문점은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예비접촉을 필두로 남북간의 각종 남북회담이 개최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판문점의 원래 지명은 ‘널문리’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신하던 선조가 강을 건너려다 다리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자, 마을 사람들이 대문짝 등 판자(널)로 임시 다리를 놓아 건너게 한 뒤 그렇게 불렸다. 1951년 10월 정전회담이 개성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회담 참석의 한쪽인 중국어 표기를 위해서 판문점으로 고쳐쓰면서 지명으로 굳어졌다. 6·25 전쟁의 휴전회담 장소로 중립적인 위치를 물색하던 유엔 측이 이곳을 회담장으로 제안했다. 이후 휴전회담은 이곳의 작은 주막집인 ‘널문리가게’ 앞의 콩밭 천막에서 진행됐다. 이때 ‘널문리가게’를 한자로 표기한 ‘판문점’이 공식 지명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서쪽의 작은 강 사천(砂川·모래내)에 널문다리가 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이 다리를 통해 포로 송환이 이뤄졌다. 당시 포로들이 한 번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뜻에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판문점내 위치도. 출처-통일부 남북회담 본부.

◆'72시간 다리'와 '돌아오지 않는 다리‘
원래 북쪽에서 공동경비구역과 연결되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 가운데로 남북 경계가 나뉜다. 북측이 판문점으로 이동하는 유일한 교량이었다. 1976년 8월 이전까지는 공동경비구역 내의 남북 통행이 가능했다. 1976년 8월 18일 북한군이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도끼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경비병 9명에게 부상을 입혔던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한다. 유엔 측은 공동경비구역 내에도 군사분계선을 긋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통행을 차단했다.
 다리가 폐쇄되자 북한군은 보급품 전달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기존 다리보다 조금 위쪽에 새 교량을 급하게 만들었다. 72시간 만에 콘크리트 다리를 완공했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 ‘72시간 다리’다. 이 다리는 주로 북쪽에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으로 오고 가기 위한 용도로 쓰인다. 이번에 귀순용사가 차를 몰고 넘어온 다리이기도 하다.
 1953년 7월27일 유엔군 총사령관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은 정전협정을 체결한 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포로를 교환했다. 양쪽 포로들은 남쪽과 북쪽으로 송환되면서 일단 이 다리만 건너면 누구도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해 ‘돌아오지 않는 다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통해 남쪽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있다.
 1968년 1월 북한 해안 인근 공해 상에서 북한에 납치된 푸에블로호의 승무원 82명은 이 다리를 통해 같은 해 12월 송환됐다. 남북 적십자회담 수석대표들도 이 다리를 이용해 평양에 다녀왔다. 1959년 옛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평양지국 기자 이동준을 비롯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모티브가 된 변용관 상위(대위) 등이 이곳을 통해 넘어왔다. 1980년대엔 공산권 국가의 중립국감독위원회와 북측 정전위원회 소속 군인들이 잇달아 망명했다.

◆1976년 8.18 도끼 만행… 북, 미군장교 2명을 무참히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유엔군측 제 3초소 앞에서 미군장교 2명과 사병 4명, 한국군 장교 1명, 사병 4명으로 이뤄진 11명 장병이 한국인 노무자들의 미루나무 가치기 절단 작업을 호위하던 중이었다. 2명의 북한군 장교와 수십명 사병이 나타나 작업 중단을 요구했다. UN측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작업을 했다. 갑자기 북한군 30여명은 도끼와 쇠망치를 휘둘렀다. 북한군은 가지치기 작업에 사용 중이던 도끼로 유엔사 경비대대 중대장 보니파스 대위와 소대장 배럿 중위를 무참히 살해하고, 한미 경비병 8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사건 직후 유엔군사령관은 주한미군의 전투태세 강화, 오키나와에 배치된 미군 전투기를 한국으로 재배치, 미 본토의 전폭기 한국 이동 등 군사 조치를 단행했다. 방어준비태세 데프콘-쓰리(DEFCON 3)를 발령했다. 북한도 8월 19일 김일성 명의로 전 군대와 노동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 예비 병력까지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유엔군사령관 스틸웰 장군은 미루나무 절단 작전을 8월 21일 실행하도록 명령했다. 미 2사단 병력과 한국군 제1공수특전단을 중심으로 작전이 펼쳐졌다. 특수부대가 트럭을 타고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가 마침내 미루나무가를 절단했다.
 북한 김일성은 8월 21일 오후 스틸웰 UN군사령관에게 “오랫동안 판문점에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라며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남북관계는 오랫동안 또 다시 얼어붙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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