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세종대왕 즉위 600년… 32년 재위 ‘백성 사랑’ 최우선
올해 세종대왕 즉위 600년… 32년 재위 ‘백성 사랑’ 최우선
  • 이두 기자
  • 승인 2018.05.10 1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방원 셋째 아들, 어려서부터 총명, 22세 즉위

 

서울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올해는 세종대왕(世宗大王·1397~1450)이 왕위에 오른지 600주년 되는 해이다. 세종은 1418년 왕세자로 책봉됐고 그해 8월 10일 조선 4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세종의 숨결이 살아있는 여주시는 즉위 6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준비 중이며 여주를 세종의 도시로 확실히 각인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여주에는 세종의 외가가 있었으며 묘가 있다. 세종은 생전 사냥을 겸한 군사 훈련 등 여주를 3번 방문했다.
◆‘애민정신’으로 훈민정음 창제
세종대왕은 재위 32년(1418~1450) 동안 정치·사회·경제 등에서 쌓아올린 눈부신 업적을 바탕으로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들이 세종대왕을 가장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펼친 ‘애민정신’에 있다. 한글 창제는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손꼽힌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은 언제나 백성을 생각한 그의 철학을 확인할 수 있다. 1443년 10월,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다. 그리고 농서나 의서 등 실생활에 필요한 책들을 다수 한글 책으로 편찬하였다. 오늘날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이자, 세종대왕의 최고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세종은 재위한 이듬해에 집현전을 만들어 많은 신진 학자들을 양성했다. 왕립 연구기관인 집현전의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과학 기술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종의 행보에 힘을 실어 주었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각별한 관계에 대한 일화는 지금도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훈민정음 창제 외에도 대마도 정벌과 4군 6진 개척을 통한 국방력 강화, 왕실 연구기관 집현전의 확대·강화, 물시계 자격루와 측우기 발명, 음악정리를 위한 정간보 제작 등 정치·군사·과학·음악·언어학 등 그가 남긴 업적은 후세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과학 기술을 연구하고, 과학 기구를 발명하는 데 있는 힘을 다하였다. 젊은 과학자를 양성하여 혼천의 등 천문 관측 기구와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 등을 만들었다.

◆32년간 재위
 세종대왕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도’, 자는 ‘원정’이다. 1397년 조선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으로 태어난 세종대왕은 처음에는 왕위와 거리가 멀었다. 어릴 때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한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늘 총명함을 보였다.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태종과 갈등을 빚었던 큰형 양녕대군과 불교에 뜻을 둔 작은형 효령대군 덕분이었다. 태종의 총애를 받던 그는 무술년인 1418년 8월 10일(양력 9월 9일) 22세 나이에 조선 4대 왕으로 즉위했다.
 세종대왕의 부인은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1395~ 1446)다. 소헌왕후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로 1395년에 태어났다. 1408년(태종 8)에 충녕대군(훗날 세종)과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1417년(태종 17)에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충녕대군이 1418년(태종 18) 세자에 책봉되자 이와 함께 경빈(敬嬪)에 진봉되었다가 세종의 즉위와 함께 공비가 되었다.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한때 왕후의 지위가 위태로웠다. 심온이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아우 심정이 병조판서 박습에게 군국의 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하는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는데, 박습이 이를 왕실에 고자질하여 심온과 심정이 모두 사사되었다. 이때 소헌왕후도 폐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세종을 내조한 공이 컸으므로 무사하였다. 슬하에는 8남 2녀를 두었는데, 문종과 세조가 소헌왕후의 소생이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금슬이 좋은 부부였다고 알려져 있다. 사료에 따르면 1436년(세종 18) 10월, 세종은 사정전으로 나아가 소헌왕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우리 조정 이래로 가법이 지극히 바로 잡혔고, 내 몸에 미쳐서도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 중궁은 매우 성품이 유순하고 언행이 훌륭하여 투기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태종께서 매양 나뭇가지가 늘어져 아래에까지 미치는 덕이 있다고 칭찬했다.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매우 슬퍼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부처님과 그 가족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여 책을 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이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보’,‘법화경’ 등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이를 한글로 옮겨 ‘석보상절’을 편찬하였다.

세종대왕릉인 여주 영릉.

◆여주 영릉은 세종대왕 부부 합장, 서울서 1469년 옮겨와
여주시 능서면에 있는 영릉은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1446년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여주의 훈민정음 조형물.

◆“여주를 확실히 세종대왕 도시로” 문화제·거리조성 등 행사
올해는 즉위 600주년을 기념해 세종대왕을 주제로 한 뮤지컬·국악 등의 공연과 행사가 곳곳에서 열린다. 여주시는 세종대왕 즉위 600돌을 맞아 세종대왕문화제를 준비 중이다. 올해 열리는 제1회 세종대왕문화제는 중앙정부의 지원과 국내 주요 ‘세종대왕’ 및 ‘한글’ 관련 단체들의 참여가 예정된 만큼 여주시는 금번 세종대왕문화제를 통해 ‘세종대왕의 도시 여주시’를 국내․외 널리 알린다는 각오다.
창조, 애민의 정신으로 찬란한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세종대왕과 영릉 그리고 한글이라는 주제로 '세종로 한글거리 조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세종로는 여주IC부터 여주시청까지 약 5.2㎞구간으로 상징적 이미지가 부족했던 거리에 한글과 세종의 다양한 업적을 활용한 조형물 등을 설치해 여주만의 특화된 도시디자인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한글대문, 육교 한글디자인, 조형물 등을 설치할 계획이다.
 이 밖에 국제학술대회와 한글디자인포럼 등 새 시대를 선도하는 ‘세종대왕’의 콘텐츠를 더욱 확대해 시민과 여주를 찾는 관관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이는 여주시가 ‘세종인문도시 명품여주’라는 측면을 특성화하기 위해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도시 이미지를 구축하고 세종의 향기가 베어나고 세종의 정신이 숨어있는 세종대왕의 도시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