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5도 ‘한반도 화약고’·… 평화의 공간으로 거듭날까(시리즈1)
서해5도 ‘한반도 화약고’·… 평화의 공간으로 거듭날까(시리즈1)
  • 이두 기자
  • 승인 2018.07.1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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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과 가까운 연평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우도...오랫동안 무력 대결로 긴장 지속돼

 

연평도 어린이들이 군인들이 도움을 받으며 눈썰매를 타고 있다.

오랫동안 적대적이었던 남북관계가 평화와 화해 분위기로 바뀌면서 인천과 경기도, 그리고 북한의 황해도 앞바다에 위치한 서해 5도(西海五島)가 크게 주목받고 있다. 서해 5도는 대한민국의 영토로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를 말한다. 일부는 주민이 거주하는 소연평도를 사람이 살지않는 우도를 대신해 서해 5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해 5도에는 지난 수십년간 크고 작은 남북간의 무력 대결이 끊이지 않아 ‘한반도의 화약고’라 불려왔다. 새롭게 평화의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서해 5도를 연속으로 싣는다.
◆행정구역은 인천시 옹진군
서해 5도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제13항에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 하에 둔다'고 명시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섬이다. 현재 행정구역은 인천시 옹진군에 속한다. 광복후 한반도가 분단되기 전에는 북한의 황해도에 속했다. 우도를 제외하고는 황해도 장연군(백령도·대청도·소청도)과 벽성군(연평도)에 속해 있었다. 우도는 옹진군 연평도와 강화군 불음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외딴 섬으로 민간인은 거주하지 않고 해군·해병대 장병들만 주둔하고 있다.
1945년 9월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후 황해도 옹진군이 경기도에 속하게 되면서 서해 5도는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됐다. 한국 전쟁이 끝나면서 옹진군의 육지인 옹진반도는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이 되었으나, 서해 5도는 군사분계선 이남에 되었다. 이후 주민들은 북한의 공격에 대비해 항상 긴장된 생활을 해왔으며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다.
서해 5도는 남북 모두 긴장과 대결을 펼칠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지리적 공간이다. 남쪽 입장에서는 서해상에서 북한의 대한민국을 침공하는 것을 막는 1차 방어선이며, 북한군의 남쪽 활동 범위를 제한해 인천항과 인천공항이 안정적 기능을 유지하고 경기만 일대에서 조업하는 어민들이 평화롭게 생업을 도모할 수 있게 해주는 군사적 요충지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서해 5도 일대가 첨단무기로 요새화(fortification)된다면 황해남도와 황해북도는 물론 평양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무력대결 끊임없어
서해5도와 서해바다에서는 지난 수십년간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남북간의 무력 대결이 있었다. 지난 2010년 북한이 연평도 주민들이 사는 연평도에 포격을 발사해 한반도를 긴장으로 몰아넣음은 물론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1999년 6월 15일에 서해 연평도 부근 해상에서 남북해군간에 교전이 일어났다. 북한군이 연평도 서쪽 NLL을 침범하여 일어났다. 우리측은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발사로 교전이 일어났다. 제1연평해전 발발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이남지역에서 북한의 무력 기습도발로 남북 간 충돌이 일어났다. 이른바 제2연평해전이었다. 대한민국 해군 고속정에 대한 북한 해군 경비정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어 30분 가량 진행된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손상을 입었다. 북한군의 선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는 교전 후 예인도중 침몰하였고, 승무원 6명이 전사당하고 19명이 부상당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일어난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내에서는 서해 북방한계선 전술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이후 차단기동은 교전수칙에서 삭제되었으며 선대응후보고가 군사수칙으로 바뀌게 됐다.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0분쯤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경계 임무수행 중이던 해군 제2함대사 소속 천안함(PCC-772)이 북한 잠수정의 기습 어뢰공격으로 침몰했다. 승조원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고 58명이 구조됐다. 이 사건으로 남북 적대관계는 더욱 심화됐다.

백령도 대피소.

◆“평화 가득하길” 어민들 조업에 나설 땐 한반도기 달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후 서해5도 어민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한반도기를 어선에 달고 조업한다. 서해5도 생존과 평화를 위한 인천시민대책위원회에 따르면 백령도선주협회는 옹진군 백령도 장촌포구에서 '서해5도 한반도기' 게양식을 열고 이같이 결정했다. 어민들은 안전한 조업과 서해 어장 확장 등 평화수역에 대한 염원을 담아 어선에 서해 5도 한반도기와 태극기를 달고 조업에 나선다고 했다. 서해5도 한반도기는 기존 한반도기에 백령도·대청도·연평도 등 서해5도를 추가한 새로운 깃발로 인천시민대책위가 만들었다.
 서해5도 어장은 북한과 맞닿아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현지 어업인들에 한해 지정된 구역에서만 조업이 가능하다. 장태헌 백령도 선주협회장은 "분단의 상처를 고스란히 겪은 서해5도 어민들이 어선에 서해와 한반도의 평화를 상징하는 한반도기를 다는 것이 감격스럽다"며 "어민들이 염원하는 어장 확장도 빨리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연평도 포격’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 경 연평도에 수백발의 포가 날아들었다. 주민들은 긴급 대피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북한군은 옹진군 연평면의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대연평도를 향해 집중 포격을 가했다. 포격 상황과 TV로 생생하게 중계돼 온 국민을 경악하게 했다. 이에 우리 국군도 피격 직후 대응 사격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해병대원 2명이 전사하고 군인과 민간인 등 21명이 다쳤으며 각종 시설 및 가옥 파괴로 재산 피해를 입었다. 두려움에 빠진 연평도 주민들은 연평도를 빠져나와 오랫동안 육지에서 생활해야 했다.
연평도 포격은 휴전 협정 이후 북한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직접 포격해 민간인이 사망한 최초의 사건으로 국제 사회의 큰 관심을 끌었다. 국제 사회는 북한을 규탄했으나, 북한은 정당한 군사적 대응이었으며 모든 책임은 남측에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천안함 침몰 사건에 이어 8개월만에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남북간 갈등은 서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대청도 사구.

◆바다의 군사분계선 북방한계선
1953년 7월 27일에 당일 오후 10시의 교전선을 군사분계선(MDL)으로 하는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이 발효되었다. 그러나 해상분계선에 관하여는 정전협정에 명확한 규정 없이 '연해의 섬 및 해면에 관한 통제권은 1950년 6월 24일 이전을 기준으로 하되, 서해 5도는 UN군 사령관 관할 아래 둔다'는 규정을 두었다.
1953년 8월 30일에 마크 웨인 클라크 UN군 총사령관이 정전협정의 취지에 따라 남북간의 군사적 충돌을 억제할 목적으로 대한민국 서해 5도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도 사이의 해상에 북방한계선(NLL)을 설정하였다. NLL은 1973년 9월까지 남북 사이의 특별한 마찰없이 해상 경계선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1973년 10월과 11월에 북측 선박들이 수십차례 NLL을 침범하였고, 같은 해 12월에 개최된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측은 서해 5개 섬 주변수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관할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수역을 항행하려면 사전 승인을 받으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북측은 제1연평해전 직후인 1999년 9월에 조선 서해 해상 군사분계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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