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고교야구 ‘짱’… 5070세대 청춘을 달구었다
1970년대 고교야구 ‘짱’… 5070세대 청춘을 달구었다
  • 이두 기자
  • 승인 2016.01.30 09: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효조·최동원에 이어 황규봉 별세… "전국이 떠들썩" 프로야구 탄생 밑바탕

 

1970년대 동대문야구장에서 펼쳐진 고교야구 경기. 5070세대에겐 잊을수 없는 추억이다.

1970년대 초반 고교 야구 시대를 활짝 열었던 황규봉(당시 대구 경북고 투수)씨가 얼마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효조와 최동원에 이어 5070세대에 친숙한 인물이 비교적 이른 나이에 눈을 감았다. 5070세대들은 “야구선수 출신들은 젊었을 때 운동을 많이 해 건강할 줄 알았는 데 일반인보다 먼저 떠났다”며 “역시 가는 데는 순서가 없는 것같다”며 안타까워 했다.
  1970년대 고교야구는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당시 재학생은 물론이고 졸업생, 지역주민들까지 야구경기가 있으면 서울 동대문운동장으로 몰려들었다. 응원을 못간 재학생들은 수업시간에 라디오 중계를 들으며 울고웃었다.
  단체 응원을 위해 동대문운동장 매표소 입구에 모인 지방 학생들은 외모에서 지방티가 바로 났다. 100% 빡빡 머리였다. 서울 재학생들은 머리카락이 비교적 긴 스포츠형 머리였다. 지방 학생들은 교복도 촌스러웠다. 그렇지만 기에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동대문운동장 입구 매표소에서 상대팀 학생들을 만나면 서로 노려보며 세를 과시하곤 했다. 우승팀은 각 지역에서 카퍼레이드를 할 정도로 지역주민의 축하를 받았다.
 1960년대 후반부터 고교야구가 인기를 얻게 되자 각 언론사는 대회를 잇달아 창설한다. 기존의 청룡기(조선일보 주최)와 황금사자기(동아일보 주최)에 이어 대통령배(중앙일보 주최)가 1967년 창설되고 봉황대기(한국일보 주최)가 1971년 만들어진다. 봉황대기는 지역별 예선없이 모든 고등학교가 참가할 수 있어 중앙대회로는 규모가 가장 컸다. 50~60개팀이 참가했다. 지방에서는 화랑대기와 대붕기가 열렸다.
 

1970년대 고교야구는 전국을 뜨겁게 달굴 정도로 인기였다. 경기마다 관중석이 가득찼다.

1970년대 고교야구는 고인이 된 황규봉의 모교인 대구 경북고가 활짝 열었다. 경북고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이름을 날리더니 1971년 전국 4개 대회를 모두 석권했으며 대통령배대회는 4년을 우승했다. 남우식 이선희 정현발 천보성 배대웅 등 쟁쟁한 선수들이 뛰었다. 이들의 한참 후배인 유중일(현 삼성 감독)도 경북고 출신이다. 1972년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가 등장한다. 대통령배 대회 결승전서 9회말까지 부산고에 1대 4로 뒤졌다가 무려 4득점을 해 역전 우승했다. 김봉연 김일권 김준환 등이 활약했다. 이어 ‘오리궁둥이’ 김성한, 투수 김용남이 활약한 1976년 대통령배 우승을 차지해 군산상고 전성시대를 이어간다.
  1970년대 중반에는 대구상고(현 상원고)와 경남고, 부산고, 부산상고, 광주일고 등이 강팀이었다. 장효조 이만수 김시진 등이 활약한 대구상고가 중심에 있었다. ‘3할을 못치면 장효조가 아니다’랄 할 정도로 장효조는 ‘타격의 달인’ 이었다. 거포인 홈런왕 이만수와 정통파인 김시진은 ‘대구 야구’를 최강으로 이끌었다.
 1975년 고교야구 사상 첫3연타석 홈런타자가 나온다. 대통령배 결승서 당시 광주일고의 김윤환은 세 번 연속 공을 담장밖으로 넘겼다. 광주일고는 이후 선동열과 이종범,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 등을 배출해 야구 명문고로 자리를 굳힌다.
 1976년에는 경남고 최동원의 강속구가 빛을 발했다. 청룡기 결승서 군산상고에 20개의 삼진을 뺏으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황금의 오른팔’로 불리며 한국의 대표하는 투수로 떠오른다. 이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신일고가 황금사자기를 차지한다. 박종훈‧양승호 등이 당시 선수였다.
 

선수들이 경기전 몸을 풀고 있다.

1977년에는 충암고 공주고 광주상고 대구상고가 중앙의 4개 대회를 나눠가져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케 한다. 장호연 조범현 김경문 등이 이때 이름을 알린다. 1978년은 부산고의 시대였다. 양상문(현 LG감독)이라는 걸출한 투수가 나타나 전국대회를 잇달아 석권한다.
  1970년대 후반에는 선린상고 천안북일고가 강자로 떠오른다. 선린상고에는 박노준과 김건우란 불세출의 스타가 활약하며 여학생팬을 몰고다닌다. 1979년 선린상고는 윤석환 박노준의 활약으로 우승한다. 1980년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박노준은 선동열을 상대로 홈런포함 4타수 3안타를 기록한다. 1981년 봉황대기 결승서 박노준은 결승서 다리를 다쳐 많은 여학생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 여학생들이 지금 50대가 되었거나 50을 바라본다. 당시 선린상고 옆에 있던 신광여중 학생들이 선린상고 선수들을 위해 종이비행기를 날렸다고 한다.
 1970년대에는 한국야구를 빛냈던 김용희(현 SK와이번스감독)와 김용철, 임호균, 양승관, 하기룡, 심재원, 유두열, 천창호, 이상윤, 윤학길, 이길환 등 수많은 선수들이 있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