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붐 세대 800만명 출생… 당시 한국은 어땠나
베이비붐 세대 800만명 출생… 당시 한국은 어땠나
  • 이두 기자
  • 승인 2016.05.1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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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2)… 반공‧북진통일, 미국문화 유입, 배고픔 해결 시급

 

6.25전쟁직후 인천 배다리시장. 여자 어린이들이 목판을 들고 사탕을 팔고 있다. /인천시 제공

 베이비붐 세대 시리즈 2회이다. 첫회인 베이붐 세대의 과거현재미래(아래 관련기사 참조)에 이어 베이비붐 세대 출생 당시 한국의 상황을 싣는다.
  1953년 7월 27일 휴전됐다. 전쟁상처는 컸다. 휴전 이후 베이비붐 세대가 태어난 1955년부터 1963년까지는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바빴다. 남과북은 상종할 수 없는 원수가 됐다.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꿈꿨다. 자유의 바람을 가득 담은 미국문화가 들어왔다. 미국의 원조로 배곯이를 하는 횟수는 줄었지만 매년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다.
​ ◇반공 국시, 북진통일
​ 전쟁은 반공을 국시로 남겼다 각종 반공단체가 생겨났고 학교에서도 반공교육이 최우선 과제였다. ‘공산당 때려잡자’며 공포 분위기도 조성됐다. 빨갱이로 찍히면 목숨이 위태로웠다. 빨갱이 딱지는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반공을 주제로 한 글쓰기와 미술대회 체육대회가 학교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수시로 열려 반공의식을 강화했다.
  전쟁으로 한국사회의 급격한 인구이동과 신분변동이 이뤄졌다. 북에서 수백만명이 넘어왔다. 실향민들은 서울 남대문시장 평화시장 부산 국제시장 대구 서문시장 등에 자리잡고 상권을 주도해 나가기 시작한다.
  ◇미국 문화 마구 들어와
  미군이 주둔하면서 부대주변으로 소문난 피엑스 물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속칭 양키물건이었다. 지금도 전국의 주요 재래시장에 양키시장의 흔적에 남아있다. 미군부대 주변으로 많은 사람이 몰렸다. 기지촌이 만들어져 양공주들도 생겨났다. 혼혈아들도 쏟아졌다. 이때 이미 다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  미국식 자본주의가 들어와 누구든지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기업에게는 전쟁이 좋은 기회였다. 삼성 럭키그룹 현대 한진 등이 모두 전쟁 특수를 이용해 거대 기업으로 자리잡아 간다. 한국화약 한일합섭 동양그룹 등도 이때 탄생한다.
  전쟁을 치르며 군대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미국과 협의하에 60여만명의 한국군을 갖게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미군주둔을 이끌어낸다. 1950년대 군예산은 국가예산의 평균 절반을 넘었다. 1954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의 군사원조 총액은 13억8000만달러였다.
  ◇배고픔 해결 시급, 도시화 가속
  1960년대 중반까지는 매년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봄이 되면 먹을 게 부족해 너도나도 먹을 것을 찾으러 산으로 강으로 바다를 헤매여야 했다. 이웃집도 기웃거려야 했다. 집안 형편이 괜찮은 친구가 있으면 눈치볼 것 없이 그집에 저녁까지 눌러 앉아있기도 했다. 농촌에서 먹고살기 힘들자 무조건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화가 가속화됐다. 도시로 가면 배고픔이 해결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으로 인구가 집중됐다. 전쟁전 서울은 144만명에서 55년 156만명, 부산은 47만명에서 104만명, 대구는 31만명에서 45만명으로 늘었다. 오늘날 명절때면 벌어지는 ‘귀성전쟁’이 1950년대 후반 시작됐다. 서울은 인구가 매년 수십만명씩 늘어났으며 달동네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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