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대왕(正祖大王·1752~1800) 능행차 재현 행사가 지난 10월 6일과 7일 서울과 시흥 안양 수원 화성 일대서 펼쳐졌다. 조선 22대왕 정조는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 최고의 왕으로 꼽힌다. 조선 후기 여러 가지 개혁 정책과 탕평책으로 대통합을 추진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오랫동안 봐두었던 수원 화성으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행궁을 짓는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면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천명했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효를 만천하에 알렸다. 정조는 열한살때인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목숨을 잃는 일을 겪어야 했다. 어린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뒤주에 갇힌 생부를 살려 달라고 매달렸다.
세손이지만 세자의 지위를 가지고 생활하던 정조는 1775년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하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으로부터 집요한 방해를 받기도 했다. 대리청정이 결정될 당시 홍인한이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제기하며 세손의 권위에 흠집을 내기도 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영조는 어린 세손을 불러 동몽선습을 외우게 했고 경연 자리에서 소학을 외우게 하는 등 학습 진도를 점검하였다. 영조는 수시로 정조를 데리고 경연에 참석하여 신하들과 토론하도록 하였고, 유교적 덕치와 군사로서의 국왕의 위상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후일 정조는 왕위에 올랐을 때 여러 방면에서 할아버지인 영조의 정치를 계승하고 있음을 알렸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했다. 정약용과 이승훈 김조순 등 젊은 지식인들이 연구하며 정조의 손발이 되었다. 서얼 차별을 없애는 데도 앞장섰다. 규장각 내에 검서관 제도를 두어 서얼인 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을 등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박지원의 제자들로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는 선왕 영조를 계승해 탕평 정책을 추진, 소외되었던 남인 세력을 등용했다.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도 설치했다. 상업적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791년의 신해통공을 시행했다. 신해통공은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독점특권인 금난전권을 폐지한 것으로 상공업 발전의 기반이 됐다. 신해통공 이후 서울은 물론 평양, 개성 등 상업 도시가 발전했고 상업의 발전은 수공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던 정조는 48세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지금까지도 독살설 의혹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화성 행궁 짓고 사도세자 묘 이전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은 원래 현재 서울시립대 자리에 있었다. 풍수의 대가인 정조는 즉위 10년째인 1786년 영우원을 참배한 뒤 부친의 묘터가 좋지 않음을 알고 묘소 이전을 결심한다. 그는 부친에게 효도하고 사도세자의 정통성을 세워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정조는 은밀히 수원화성 일대를 조사했다. 마침내 수원부 읍치가 있는 자리를 낙점하고 1689년 영우원 이전을 명령한다. 수원부 읍치는 오래전부터 왕릉으로 들어설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만큼 명당이었다. 그러나 왕의 묘소를 짓거나 이전하는 문제는 정치 권력과 밀접하기에 실행되지 못했다. 선조와 효종의 묘지 자리로 거론되기도 했다. 서인의 거두였던 송시열은 효종의 묘가 들어서면 서인이 몰락할까봐 강력 반대했다고 한다. 정조는 남인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수원부 읍치를 사도세자 묘지로 잡았으며 남인의 주도하에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대왕이 이룩한 업적 중 하나이다. 1794년 공사를 시작해 2년 6개월 만에 성벽 둘레 8.36㎞라는 성을 완공했다. 당시 정약용이 개발한 거중기를 활용해 성을 빠르게 짓는데 한몫했다. 화성은 전쟁에 대비한 산성으로서도 한몫을 한다. 기존의 성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읍성과 산성이 분리가 됐다. 하지만 화성은 읍성과 산성을 융합한 획기적인 성이 조선역사상 최초로 탄생됐다. 수원 화성은 지난 1997년 유네스코에 등재됐다.
정조는 화성을 단순한 군사적 기능을 수행한 성곽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개혁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를 시험하는 무대로 삼고자 하였다. 일단 축성 과정에 당시로써는 가장 선진적인 축성 기술을 도입하였고, 그가 즉위 이후 육성했던 정약용 등 측근세력을 대거 투입하여 주도하게 하였다. 화성을 포함한 수원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국영 농장인 둔전을 설치하고, 경작을 위한 물의 확보를 위해 몇 개의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선진적인 농법 및 농업 경영 방식을 시험적으로 추진하였다.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가” 술을 즐겼던 정조
정조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어린 나이에 부친의 죽음을 보아서 그런지 몸놀림이 굉장히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일기를 꼬박꼬박 써 국왕이 된 뒤에도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피곤이 풀린다고 할 정도로 독서를 좋아했다.
정조는 매우 근검했다. 옷은 임금이 입는 곤룡포와 면류관, 정식 군복을 제외하고 비단이 아닌 모두 목면으로 입었다. 음식도 가짓수를 적게 했다. 식사 후에 반찬이 남으면 이를 반드시 챙기라고 했다. 정조는 술을 매우 좋아했다. 지나친 음주의 폐해를 알고 신하들에게 술을 경계하라고 했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 취할 정도로 마셔야 한다고 했다. 신하들과 모임에서 ‘불취무귀(不醉無歸)’라 하여 취하지 않으면 귀가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정조는 27명의 조선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재위하는 기간 동안 직접 쓴 여러 형식의 글을 모아서 만든 '홍재전서'(弘齋全書)다.
◆“정조는 독살됐다” 끊임없는 의혹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숨을 거두었다. 영조의 계비이자 정조의 정적이었던 정순왕후가 갑자기 혼자 약을 들고 정조의 침전을 찾았다. 의관과 사관들이 모두 물러났다. 잠시후 “전하가 승하했다”며 정순왕후가 나왔다. 신하들이 정조의 침전으로 들어갔으나 정조는 “수정전”이라는 말을 토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수정전은 정순왕후의 거처였다. 당시 정순왕후는 정조의 병이 영조가 돌아갈 때 병세와 비슷하다고 판단해 그 때 복용했던 약을 주려했던 것같았다.
정조는 종기로 상당기간 고생했다. 여러 차례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의관을 바꿔가면서 건강을 살폈다. 머리에까지 종기가 있음이 밝혀졌다. 화병과 울화도 건강을 해쳤다. 정조는 숨지기 하루전 연훈방을 사용했다. 연훈방은 방문을 닫고 수은을 태워 연기를 쐬는 방식이다. 연훈방으로 정조는 잠시 컨디션을 회복하는 듯했다. 방안에서 몸을 움직였으며 밖으로 걸어나가고 신하와 대화를 나눌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다. 그러나 정순왕후 방문후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