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환생하는 맥아더… 자유수호자였나, 확전론자였나
영화로 환생하는 맥아더… 자유수호자였나, 확전론자였나
  • 이두 기자
  • 승인 2016.02.0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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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지독한 군인” 평가, 대통령 꿈꿔… 이승만과 절친, 매년 동상앞에선 이념충돌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로 분장한 리암니슨. 맥아더와 흡사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인천상륙작전이 영화로 만들어져 오는 6월 개봉예정이다. 이정재 이범수 진세연 정준호 등 국내 유명배우가 출연한다. 영화 ‘테이큰’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미국 배우 리암니슨(64)이 맥아더 장군으로 나와 화제다. 리암니슨의 분장이 맥아더와 흡사해 ‘맥아더가 환생했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리암니슨은 맥아더라는 인물을 새로 알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왔다고 했다. 인천자유공원에 동상으로 우뚝서서 상륙작전이 펼쳐진 인천 앞바다를 내려보고 있는 맥아더는 과연 누구인가. 설을 앞두고 ‘맥아더’라는 위인을 만나보자.

◇5000분 1 확률 성공
  인천상륙작전은 확률이 5000분 1일 정도로 성공 가능성이 낮았다.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군함들이 제대로 상륙하고 병사들이 시간 안에 뭍에 오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유엔군총사령관인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내놓자 미국 대통령과 군부는 강력 반대했다. 맥아더는 밀어붙여 성공했다. 북한도 인천상륙작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이 답보 상태였기에 북한은 초조했고 인천쪽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실제로 상륙작전을 감행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상륙작전 성공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은 빠른 속도로 북진했다. 맥아더는 당초 중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며 참전하더라도 중국군 수가 10만명이 안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본국에서 보내도록 하겠다며 사기를 북돋았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맥아더는 1951년 2월 북한 집중폭격과 핵공격이라는 강경카드를 꺼내든다. 나아가 중국의 붕괴를 노려 군사작전을 중국연안과 본토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편지가 공개된다. 3차세계대전을 우려한 트루먼대통령은 ‘앗 뜨거’하며 바로 맥아더를 해임한다.
  말년의 맥아더는 1962년 미국을 방문한 김종필씨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나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다. 6,25당시 북진통일이 되지 않아 인도차이나반도 사태가 일어났다”며 강경책을 펼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대통령을 꿈꿨지만…
  맥아더는 1880년 미국 아칸소주의 육군 기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가 군인이었기에 태어날 때부터 군과 인연을 맺었으며 병영의 나팔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어릴적 맥아더는 엄친아였다. 어머니로부터 거짓말하지 않기, 한눈팔지 않기, 껍씹지 않기 등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척추이상으로 육군사관학교를 늦게 들어갔으나 1903년 수석으로 졸업한다. 1905년 조선을 두고 벌어진 러일전쟁의 만주전투를 참관한다. 그는 일본군의 군기와 단결력, 사무라이 정신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맥아더가 조선을 방문했다는 설이 있으며 아버지는 고종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군시절 그는 “육군에서 가장 지독하게 싸우는 군인”이라고 평가를 받았다.
  1930년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으며 1937년 퇴역하나 일본의 진주만공격으로 다시 극동군사령관으로 군에 복귀한다. 일본군은 “맥아더를 생포해 도쿄 궁성에서 공개교수형에 처할 것”이라며 장담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1942년 맥아더는 58세에 아들을 깊이 사랑한다는 ‘아버지의 기도문’<관련기사 참조>을 탄생시킨다. 이는 그가 죽은 후 유품 정리중에 발견돼 지금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연합군총사령관으로 일본을 다스린다. 한국전쟁 오판과 강경책, 트루먼 대통령과 불화로 1951년 해임된다. 1952년 도쿄사령관 집무실을 떠날 때는 200만 일본인이 모일 정도로 인기였다. 귀국 환영대회에는 700만 인파가 몰렸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며 의회 연설을 하고 대통령을 꿈꾼다. 그러나 평생 군인이었던 그는 협상에 서툴렀다. 대통령후보 지명에 탈락한 뒤 이름뿐인 기업인으로 한때 활동하다 1964년 눈을 감았다.

인천자육공원의 맥아더 동상. 1957년 세워졌다.

◇맥아더 동상과 인천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은 1957년 세워졌다. 월미도에 세우려 했으나 사람이 많이 찾는 자유공원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와 민주수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과 인천 두 곳에 동상을 세웠다. 서울 광화문의 동상은 언제 철거되었는 지 알 수 없다. 인천자유공원의 원래 이름은 만국공원이었다. 맥아더 동상이 세워짐과 함께 이름이 자유공원으로 바뀌었다. 1964년 그가 눈을 감자 서울에 빈소가 차려졌다. 한때 맥아더를 신으로 모시는 무당도 있었다.
  맥아더와 이승만 대통령은 여러 차례 만났으며 사이가 좋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때와 1950년 서울수복 환영 행사때 함께 참석했다. 6.25 바로 직후 맥아더는 이승만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무기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맥아더 동상은 10여년전부터 이념 충돌의 장이 되었다. 2004년 진보단체가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하면서부터다. 특히 상륙작전일인 9월 15일을 전후해서는 보수와 진보 단체가 잇달아 집회를 가지며 철거와 보존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006년에는 미국의회가 맥아더 동상을 본국으로 갖고 가겠다는 의사 표시를 하기도 했다. 매년 9월 15일을 전후해 월미도 앞바다에서는 상륙작전 재현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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